지난 주에 교회의 한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가난한 사람' 나사로는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의 현세에서의 삶이 비참했었기 때문에 그의 구원은 반 쪽짜리였다는 것이다. 말인즉, 완전한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현세에서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복을 누리며 살았을 것이라는 식의 말이었다.
이 말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면 다음과 같다. 그렇다면, 같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과연 복을 받은 사람이었냐는 것이다. 현세에서 좋은 옷과 좋은 음식을 먹으며 호화롭고 안락한 삶을 살았던 부자는 어째서 지옥으로 갔을까? 설마하니 현세에서 나중에 사용할 복까지 다 사용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는 것은 아니겠지.
예수님은 왜 사람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을까를 생각해 봐야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은 많은 자녀와 부유한 삶, 건강한 육신과 지혜를 얻게 된다고 믿고 있었다. 반대로 자녀가 없거나, 가난하거나, 질병과 환란을 겪는 것은 그 사람의 신실하지 않음이나, 죄 때문에 하늘의 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통념에 의하면 부자는 '복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편에 더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반대로 나사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이요, 죄인이요, 저주받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가 지은 죄, 또는 그의 부모가 지은 죄로 말미암아 고통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는 이와 같은 유대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복받은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부자는 지옥으로 가고,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여겨졌던 나사로는 천국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의 비유는 유대인들의 통념을 깨기위한 장치인 셈이다.
태어날 때부터 눈먼 자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이 죄와 저주때문에 날 때부터 눈 멀어 살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고통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에, 오히려 고통을 더하도록 하는 사람도 있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실 때,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하신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처지는 그 사람의 죄나,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고 그의 눈을 고쳐 주셨다. 예수님의 선언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은 다시 평가되게 되었다. 죄와 저주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증거된 사람,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게 되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의해 눈먼 자는 눈뜸을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 사람들은 구원을 얻게 되고, 살 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계속해 나가신다. 부자와 나사로도 마찬가지이다. 부자의 부유함, 나사로의 가난함은 하나님 안에서 다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자는 그에게 주어진 것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했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가난한 자 나사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다. 노력과 성실은 나사로의 삶에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십일조와 희년등의 방법을 통해 가난한 자들이 살 길을 열어놓으셨지만, 부자는 그 방법을 외면했다. 부자는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외면하고 축적한 것으로 자신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부자의 부유한 삶은 당시 유대사회의 구조 가운데에서는 성실과 노력의 결과라기 보다는 죄의 증거였다. 그의 상 아래에 앉아있는 나사로의 존재는 부자의 이러한 죄의 증거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 아브라함의 팔에 안겨있는 나사로의 존재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의 증거이다. 부자는 나사로를 외면했지만, 하나님은 나사로를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것을 지적하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복있는 자와 저주받은 자의 기준은 뒤바뀌게 된다. 이 비유를 듣는 사람들은 경악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다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로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품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일하시는 손이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증거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은 스스로 움직이셔서 구원을 이루신다. 그러니 이것은 성도의 불순종의 상징이기도 한다.
진정한 복은 사단의 기준에 따라 열심히 달림으로 승리자의 반열에 서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있는 자, 복된 삶을 누리는 자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이 때를 따라 공급해 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는 것은 자랑거리도 아니요,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믿음이 더 뛰어나다는 말도 아니다. 이것은 다만 하나님이 그 성도를 들어 사용하신다는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가 다시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을 채택하고, 부자로서 자신의 삶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것을 복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버리고 사단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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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흐르는 강물 2011/07/08 17:25 # 삭제 답글
샬롬 반갑습니다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실적 표현으로 받아들여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말씀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즐겨 사용하셨는데 왜 유독 이 구절만큼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이라고 우기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자는 당시 율법을 지니고 장자됨과 언약된 백성,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부요했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이고 나사로는 그 부를 지니지 못한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부자라 비유하신 것이고 이방인을 거지 나사로라 비유하신 것이죠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고집을 부리는 이스라엘은 선민의 지위를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맺는 백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될 것에 대한 비유인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비유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길 기도드립니다...